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
하나님 주신 사랑실현 기회로 여겨/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서울대 법대. 시법고시 나란히 합격/
"인간애(人間愛) 실천했을 뿐"/
【뉴스제이】 최재형 감사원장(서울대법대 79년 졸업)의 학창시절 감동이야기가 눈물과 감동을 준다.
소아마비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친구 강명훈(변호사 / 서울대 법대 80년 졸업)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했고, 같이 서울대 법대 합격한 후, 또 같이 사시에 합격한 친구의 우정이야기가 1981년 화제가 되면서 조선일보를 통해 기사화가 되었다.
당시 취재했던 조선일보 김효재 기자는 “우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인간애의 고뇌들이 있다.”라고 두 사람의 벅찬 인간애와 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최재형 감사원장을 심층취재(월간조선 10월호) 했던 월간조선 최우석 기자는 “작은 자, 보잘것 없는 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최재형 원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 키워드 중 하나를 그의 종교다. 최 원장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최재형 원장 지인 중 상당수가 최재형 감사원장을 평가할 때, 종교와 연결 지어 설명하곤 했는데, 그만큼 기독교 정신은 최재형 원장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큰 요소로 작용했다.”라고 말했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교회를 다니게 된 배경엔 부모가 있었다. 아버지 최영섭 대령과 어머니 정옥경 여사가 동교동 인근 신촌교회에 출석했다. 최재형 감사원장도 자연스럽게 신촌교회를 다녔고, 신촌교회 장로가 되었다. 최 원장은 ‘감사원장’에 임명된 후, 휴무(休務)장로가 됐다. 이유는 감사원장이라는 자리가 주는 중립성을 지켜야하고, 국정에 바빠 교회 봉사를 소홀히 할수 았다는 생각에서다. 아내 이소연 여사도 신촌교회 권사다.
최재형 원장은 신촌장로교회에서 ‘평생지기’ 강명훈(姜明) 변호사를 만난다. 그들의 피보다도 진한 우정은 1981년,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큰 화제를 낳았다.
최재형이 감사원장이 경기고등학교 학창시절, 친구 강명훈을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해 서울대 법대를 합격 후, 사시에 같이 합격한 우정이야기는 강명훈이 보인중 3년, 최재형은 경기고 1년에 재학 중이던 72년 봄에 처음 만나 시작되었다. 둘 다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학년은 최재형이 하나 위였으나 나이는 명훈과 동갑이었다. 경기고에 다니던 최재형은 이왕이면 명훈이가 자기가 다니는 경기고에 입학해서 등하교를 시키고 같이 도와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는 응답되었고 명훈이는 경기고에 추첨이 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지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명훈이에게 재형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재형이로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사랑을 실현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여겨졌다.
하나님의 은혜아래 열심히 노력한 끝에 최재형은 75년에, 강명훈은 76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명훈이가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재형은 눈이 오는 날이면 명훈이가 강의실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아침 일찍 명훈을 찾아가 도와주곤 했다. 그런 헌신적인 친구 재형을 볼 때마다 명훈은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명훈이는 성경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을 외었다고 한다. 바울의 빚진 자 마음으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1년 먼저 졸업한 在(재형)이는 두번 고시에 응시 했으나 낙방했고 明(명훈)이도 한번 고배를 들었다. 실망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보낸 1년의 두터운 우정은 인간애로 승화시키면서 둘은 끝내 나란히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최재형 감사원장의 이런 헌신적인 사랑은 천성이라 생각된다. 월간조선 최우석 기자의 최재형 감사원장 인터뷰(월간조선 2020년 10월호)에서 최 원장의 또다른 사람 사랑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두 아들 입양이야기다.
최재형 원장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고, 그 밑으로 아들 둘을 각각 2000년(차남)과 2006년(장남) 입양했다. 흔히 ‘가슴으로 낳아 기른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최재형 원장 부부는 한 명이 아닌 둘을 자녀로 받아들였다. 여기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최영섭 대령이 말하는 ‘입양 스토리’다.
“며느리(이소연씨)가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던 고아(孤兒)들을 기르는 기관에서 봉사를 했어요. 거기서 핏덩어리를 맡아 1년 정도 봉사 차원에서 키웠는데, 그때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그래서 결심을 한 거죠. 그렇게 받아들인 아이가 지금의 둘째 아들이에요. 내가 재형이한테 그랬어요. ‘네 나이가 이제 50줄에 접어드는데 괜찮겠냐’고요. 재형이 부부는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더라고요.”
최영섭 대령은 손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재형이 첫째 아들이 나처럼 해군에 입대했잖아요. 근데 이 녀석이 사격에서 1등을 했다고 그러더라고. 나중에 갑판병으로 배정될 때에도 10등 이내로 들어갔다고 하대요. 손자 두 놈이 나를 좋아해요.(웃음) 그중 큰놈이 나한테 ‘할아버지 제가 군대에서 배운 게 있어요’ 그러대. ‘뭐냐’고 물었더니 ‘인생을 사는 데 노력한 만큼, 땀 흘린 만큼 '리워드'(reward·보상)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대요. 큰놈은 손재주가 있어서 지금 패션 디자인 계통에서 일하고 있어요. 재형이 부부가 두 아들을 살뜰하게 키웠어요. 그건 내가 너무 잘 알지.”
아내 이소연 권사가 동대문 근처에 있던 고아(孤兒)들을 기르는 기관에서 핏덩어리를 맡아 봉사 차원에서 키웠는데, 그때 정이 들었고, 부부는 그 두 아이를 입양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최재형 감사원장과 이소연 여사는 ‘사람사랑 DNA’가 있다.
信仰(신앙)으로 승화한 「友情(우정)10년」
-나란히 司試(사시)합격한 姜明勳(강명훈)-崔在亨(최재형)군 "짙은 사귐"-
지체부자유 강(姜)군의 손과 발 되고/
친구에 "구김살 없는 마음" 보답 강(姜)군
밤새우며 고뇌(苦惱) 격려하기도
고교—대학(大學) 함께 다니며 무르익어
"인간애(人間愛) 실천했을 뿐"
【조선일보】 친구끼리인 두 사람이 나란히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은 그리 대수로울 것이 못된다. 그 두 사람이 유달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것이 떠들썩한 얘기 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소아마비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강명훈(姜明勲)군(25·서울대 법대 80년졸업)과강(姜)군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업어서 등하교시키며 같이 공부해온 최재형(崔在亨)군(25·서울대법대 79년졸업)이 17일 나란히 사법시험(2차)에 합격하기까지에는 우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벅찬 인간애의 고뇌들이 있다.
명훈(明勲)과 재형(在亨)이 처음 만난 것은 명훈(明勲)이 보인중 3년에, 재형(在亨)이 경기고 1년에 재학 중이던 72년 봄이었다.
둘 다 교회에 다니던 이들은 신촌장로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졌다.
돌 지나면서 소아마비를 앓아 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지체부자유아였던 명훈(明勲)은 그러나 성격만은 정상인을 놀라게 할 정도로 건전했고 명랑했다.
학년은 하나 위였으나 나이는 명훈(明勲)과 동갑이었던 재형(在亨)은 지체가 부자유스러우면서도 구김살 없는 명훈(明勲)이가 신기하게까지 느껴졌고, 사지가 자유스러우면서 때로 좌절하기 잘하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명훈(明勲)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됐다. 재형(在亨)은 몰래 기도했다. 이왕이면 명훈(明勲)이가 자기가 다니는 경기고에 입학해서 같이 도와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명훈(明勲)이가 창천동에, 재형(在亨)이가 동교동에 살았기 때문에 같이 다닐 수 있게 된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기도의 덕분이었는지 명훈(明勲)이는 경기고에 추첨이 됐다. 중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지만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하는 명훈(明勲)에게 재형(在亨)은 스스로 지팡이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재형(在亨)이로서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사랑을 실현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여겨졌다. 다행히 명훈(明勲)이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아침에 재형(在亨)이가 오면 같이 택시를 타고 학교 앞까지 갈 수 가있었다.
명훈(明勲)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교길에 신촌 부근에서 내린 둘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명훈(明勲)이는 양손에 책가방을 들고 재형(在亨)이는 명훈(明勲)이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 중간쯤 왔을 때 등 뒤에 업힌 명훈(明勲)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공중변소나 화장실이 있을만한 곳이 없었다.
명훈(明勲)이는 등에서 내려달라고 했지만 재형(在亨)이는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명훈(明勲)이는 등에 업힌 채로 실례를 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재형(在亨)이는 명훈(明勲)이 우는걸 보았다. 그 눈물은 다 큰 녀석이 길거리에서 실례했다는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감추고 스스로 극복하려 했던 신체의 결함이 사소한 곳에서 아픔으로 되살아난 그런 눈물이었다.
그날 밤, 둘이는 명훈(明勲)이집에서 같이 밤을 새워가며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려면 서로 믿는 것 이외에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재형(在亨)이는 명훈(明勲)이를 업고 거리를 다닐 때 마다 느껴지는 행인들의 눈초리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뚜렷이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친구의 지체가 부자유해 좀 도와주기로서니 그게 무슨 이상한 일이냐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재형(在亨)이는 75년에, 명훈(明勲)이는 76년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명훈(明勲)이는 기숙사로 들어갔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도 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이면 강의실까지 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아침 일찍 찾아와주는 재형(在亨)이를 볼 때마다 명훈(明勲)이는 「사랑」을 보는 것 같은 뭉클한 느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명훈(明勲)이는 성경의 로마서에 나오는 귀절을 외었다. 『…내가 헬라인이나 유다인이나 야만인에게 모두 빚진 자이니라.』
1년 먼저 졸업한 재형(在亨)이는 두번 고시에 응시 했으나 낙방했고, 명훈(明勲)이도 한번 고배를 들었다.
실망하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보낸 1년의 두터운 우정은 인간애로 승화 시키면서 이제 둘이는 끝내 나란히 합격했다.
『우리 둘에게 있어 시험에의 합격이라는 현시적인 결과는 별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의지(意志)가 되고 기둥이 되는 인간끼리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내가 오늘날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지탱해준 모든 사람의 뜻이 응집된 것뿐입니다.』—담담하게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명훈(明勲)이의 말을 재형(在亨)이가 받았다.
『둘이 같은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앞으로도 서로 도우라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 같아요. 앞으로 저나 명훈(明勲)이나 많은 문제에 부딪치겠지만 훌륭히 극복할 것으로 압니다.
사실 명훈(明勲)이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눈을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이 있을 뿐아니라 지체가 자유스러운 사람보다 훨씬 넓은,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김효재(金孝在)기자> 조선일보(1981.06.18.)
[출처 :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852119810618m1071
나관호 교수목사 ( 뉴스제이 발행인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긍정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말씀치유회복사역(LHRM) 대표 / 치매가족 멘토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