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예의가 복음이다
[나관호목사 칼럼] 예의가 복음이다
  • 나관호 목사
  • 승인 2023.12.19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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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237]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예의(禮儀) 지키자/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3)/

【뉴스제이】 나에게는 성경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지키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께서,,,,” 이런 구절이 나오면 “예수님께서 .....”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 이 부분도 “성령님께서”라고 읽습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성령님’이라고 씁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한 예의(禮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다가 ‘성령’이라고 타이핑이 쳐지면, 빨리 ‘님’자를 넣고는 “성령님! 죄송해요. 잘 고쳤지요”라고 고백하고는 웃습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나 영어권에는 물론 존칭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글에는 있는데, 왜 번역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글개역 성경에는 ‘예수님’, ‘성령님’으로 바꾸면 좋을 것입니다. 그때 저를 편집위원으로 넣어 주십시오.

“예수님! 마음의 소원입니다. 한글 성경이 바뀌게 도와주세요. 성령님! 감화 감동하셔서 누군가에 의해 추진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을 씻기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편한 복장으로 제자들 발을 씻기시고 난 후, 힘도 드셨을테니 그냥 편한 복장으로 앉아 대화를 해도 무방했을 것입니다. 아마 제자중 일부는 세족식한 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휴!”하고 털썩  주저 앉으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복장을 제대로 갖추시고 식탁에서 제자들과 둘러 앉아 대화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의’입니다. 발을 내놓고 있던 제자 누군가는 깜짝 놀라 바른 자세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 중, 중요한 것이 ‘예의’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지킵니다. 예의 없는 능력과 예의 없는 신앙생활은 모조품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합니다. ‘불량 크리스천’의 행동입니다. 예의는 믿음의 열매요, 지표입니다.

교회에서 인사만 잘해도 은혜가 되고, 교회에서 예의 바르게 초신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정착을 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도 예의 바른 크리스천의 행동은 은혜를 줍니다. 예의가 복음입니다. 

어느 집에 가서 아이들의 예의 상태를 보면, 그 가정의 현실과 교육 상태를 알게 됩니다. 어른을 보면 두 손 모아 정중하게 인사하는 자녀를 보면, 가정교육이 잘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과 부교역자들의 외부인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교회의 수준을 알게 됩니다. 어느 기독교단체 모임에 갔다가 초청자가 없어서 그런지, 유명 목사가 아니라 그런지, 예의 없이 쉽게 대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가르친 제자 정도로 보였는데....

나는 신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수 입장에서, 신학교 교과 과정 중에 ‘신앙예의’를 가르치는 과목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라.” ‘사람부터 되라’는 것은 ‘인성을 갖춘 사람, 예의 바른 목사와 전도사’가 되라는 말입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자리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크리스천은 “예수 믿는 것들”, “아휴, 그것들”,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들”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예의’라는 말이 크게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어 갈까를 생각했을 정도로 불쾌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좋은 크리스천, 믿음이 큰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떤 성도들과 접촉했기에 저러나 싶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착할 행실, 즉 예의 바른 행동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그리고 성경을 축소하고 또 축소해 응축시킨다면, 마지막에 남을 구절은 ‘누가복음 10장 2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27)

사랑이신 하나님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빠진 믿음은 신념이거나 자기암시가 됩니다. 믿음은 ‘좋고, 나쁘고’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크다’로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작은 믿음, 큰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크고, 작다’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크리스천의 투영된 삶으로, 예의 바른 행동으로 믿음이 나타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많이 하고,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는 성도를 보면,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으세요”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행동을 달아보아 무게를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보여진 것으로 무게를 가늠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음과 행동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보십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3)

신앙 속 예의는 아주 중요한 열매입니다. 거듭난 사람, 믿음이 큰 사람은 다른 말로 말해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 믿음과 신앙 예의가 같이 자라야 합니다. ‘매너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큰 믿음입니다. 예의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나관호 교수목사 (뉴스제이 발행인 및 대표 / 치매가족 멘토 / 작가, 칼럼니스트, 문화평론가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기독교윤리실천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제자선교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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