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다/
목사와 전도사,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다/
의사와 간호사, 돕는 사람 헬퍼다/
결국 ‘사람’,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됩니다/
【뉴스제이】 언젠가 강의 중,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하기도 한 질문, 생각해볼만한 질문들입니다.
“교수님!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좋은 사람을 보면 ‘얼짱’이 아니라, ‘얼꽝’같아요, 전 얼굴이 예뻐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교수님!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좋은 목사, 좋은 전도사란 어떤 사람을 말하나요? 큰 교회를 만들고 능력이 나타나야 좋은 목사인가요?”
제자들의 이런 질문은 본인들에게는 꾀 진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얼짱’도 ‘얼꽝’도 아닌, ‘마음짱’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행동’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십니다. (참고기사 : [은혜 칼럼] "목사님, ‘얼꽝’만 쓰임 받나요?" )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좋은’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을 말합니다. 큰 교회 담임목사이거나 능력이 나타나는 사역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기에 ‘좋은 목사’는 외형의 크기가 아니라, 그런 역사를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겸손을 가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역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것과 작은 것, 그런 외형적 크기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마음짱’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마음은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목사가 사람 자체를 본질적으로 사랑해야지, 사람을 무시하고 성도들을 하인처럼 부리고, 마구 대한다면 좋은 목사가 아닌 나쁜 목사입니다. 전도사가 성도와 교회 손님을 귀하게 대해야지 이해관게가 없는 사람을 쉽게 대하는 풍토는 나쁜 전도사인 것입니다. 목사와 전도사는 돕는 사람이지 다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사가 간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환자를 아끼고 사랑해야지 환자를 무사하고 막 대한다면 의술이 뛰어나도 좋은 의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진찰할 때 부드럽고 온화하게 진단해야지 겁박하듯 목소리를 높여 질병의 위험성으로 겁을 준다면 좋은 의사가 아닙니다.
그리고 간호사도 환자에게 주사를 놓을 때 존중하는 태도로 부드럽고 아름답게 주사를 놓아야 합니다. 그냥 바늘을 찌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좋은 간호사가 아닙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돕는 사람이지 다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의 기본 개념은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군림하고 사람을 막 대하는 마음은 ‘나쁜’입니다.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목사와 전도사 더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 등 모든 리더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서 ‘좋은’과 ‘나쁜’의 기본 개념으로 판단하며 좋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기준이고 사람이 표준이며 사람이 교과서입니다. ‘좋은’과 ‘나쁨’의 기준은 결국, 사람입니다.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기질이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은 일반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며, 끼리끼리 잘 모이는데 자신들과 다르면 집단 따돌림을 잘하는 일반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리를 찾기보다 비열해 보입니다. 일본에서 남녀혼탕 문화가 아직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끼리끼리문화와 자기집단문화가 강해서입니다.
또한,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특징짓는 말 가운데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혼네'란 마음속에 있는 본심이라면, '다테마에'는 이와 반대로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로 돌려서 말하는 겉마음, 즉 포장언어를 말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됩니다. 상대의 면전에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고‘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라며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데 그 말은 곧 거절입니다. 솔찍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왕서방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이익에 맞춰 거래하듯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은 철저히 잘 감추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과 주변 상황을 많이 아는 것을 능력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밀스러운 것도 알려고 가면을 쓰고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고 자기 이익에 맞춰 대인관계를 가지는 기질이 있습니다. 솔찍하지 못합니다,
중국 문화에서는 '러나오‘(熱鬧)라 하여 ‘떠들썩한 것’을 활기가 넘치는 것으로 보고 숭상하는 문화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공공장소에서 큰 목소리로 종종 소음을 일으키는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중국인들은 남을 계략으로 속이는 것을 지혜로운 행위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국지’의 수많은 계략들 또한 이러한 중국인의 성향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지어 남에게 속은 자를 '멍청한 자', '아둔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남을 속이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 '현명한 사람'으로 우러러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중국인의 기질 때문에 중국 부모들은 자녀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남에게 속지 말라'고 가르치며, 이는 일본 부모의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라', 한국 부모의 '남에게 기죽지 마라'와 같은 가르침과 비교됩니다.
따라서 중국인은 남의 것을 표절하거나 훔치는 것을 '지혜로운 행동'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아예 없습니다. 중국의 짝퉁과 표절은 국민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용이합니다.
더 나아가 중국인들은 자기의 이익이 상실되면 꼭 복수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뒤끝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 탓으로 중국무협지 영화를 보면 항상 복수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입니다.
거기에 반해 한국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은 기질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나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을 통해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위해 행동합니다. 합력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존중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아이디어로 만들어 취하며 혼자만의 성공을 만들어가는 기질이 있습니다,
한국에는‘체면문화’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영향이 그 속에 강하게 배어있어 선비나 양반일수록, 이런 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양반은 체면 때문에 소낙비가 내려도 절대로 뛰어서는 안 되며, 냉수를 마시고도 이를 쑤시며, 가난할수록 기와집을 짓는다든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식의 의식들이 전형적 체면문화 행태입니다. 사대부 가문에서는 아무리 어린 자식이 귀여워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을 금기시했다. 말하자면 인간이 자연스레 가질 수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표현들이 체면문화로 억제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 사람을 성격으로 분류하는 대표적인 기질입니다. 공동분모는 역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든 이웃이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사람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나관호 교수목사 (뉴스제이 발행인 및 대표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칼럼니스트 / 치매가족 멘토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제자선교회(DCF) 이사 )